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리히 3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하인리히 3세의 첫 가정교사는 [[아우크스부르크]]의 [[주교]] 브루노였다. 1029년에 브루노가 죽자 프라이징의 [[주교]] 앵겔베르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. 1033년 16살의 나이에 하인리히는 성년이 되었고 앵겔베르트는 그의 서비스를 보상받았다. 1035년 케른텐의 [[공작(작위)|공작]] 아달베로가 [[콘라트 2세]]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났다. 그러나 앵겔베르트는 하인리히에게 이 부당함을 거부하고, 왕이 했던 것처럼 하지 않는다면 퇴위를 하지 않고 제후들이 하인리히를 왕으로 선출한다고 설득했다. 그는 아버지가 했던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앵겔베르트와 약속했다. 그리고 [[콘라트 2세]]는 하인리히가 태도를 바꿔 많은 시도를 하자 다음에 충격을 받아 실신했다. 회복된 다음에 콘라트는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정밀하게 합의했다. 결국 앵겔베르트는 황제에게 처벌을 받았다. 1036년 하인리히 3세는 [[크누트 대왕]]의 손녀 [[덴마크]]의 군힐다와 결혼했다. 초기에 콘라트 2세는 크누트와 북[[독일]]의 일부 지방을 크누트가 다스리고 그들의 자식들을 결혼시키자고 합의했다. 두 사람은 법정 나이에서 가장 빠를 때에 [[네이메헌]]에서 결혼했다. 1038년에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원조로 이탈리아로 갔는데 돌아올 때 군힐다가 아드리아 해안에서 죽었다. 1039년에 역시 아버지 [[콘라트 2세]]도 사망해 하인리히 3세가 [[황제]]가 되었다. 하인리히 3세는 그의 통치 첫 해를 영토 순방으로 보냈다. 그는 상하 로트링겐의 [[공작(작위)|공작]]인 고셀로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 저지대를 방문했다. [[쾰른]]에서는 작센에서 그와 동행했던 [[대주교]] 헤르만 2세와 합류했다. [[튀링겐]]에서 [[마이센(독일)|마이센]] [[변경백]] 에케하르트 2세를 만날 때는 [[군대]]를 이끌고 갔다. 보헤미아 대사가 인질을 부담해 하인리히 3세를 달랬으며 그는 군대를 해산시킨 뒤에 뒤에 순방을 계속했다. 그는 부르고뉴 대사와 밀라노 대주교 아리베르트에게 인정받은 후에 잉겔하임으로 돌아왔다. 아리베르트와의 [[평화]]는 제국의 유일한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. 1039년, 영토를 순방하고 있을 때에 케른텐 [[공작(작위)|공작]]인 [[콘라트 2세]]가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. 가까운 친적인 하인리히가 자동으로 [[케른텐 공국]]을 상속받게 되었다. 하인리히 3세는 이제 [[바이에른]], [[슈바벤]], 케른텐의 공작이 되었으며 [[독일 왕국|독일]], [[부르군트 왕국|부르고뉴]], [[이탈리아 왕국(신성 로마 제국)|이탈리아 왕국]]의 왕이 되었다. 1046년, 수트리 종교 회의에서 하인리히 3세는 교황 [[클레멘스 2세]]를 압박하여 성직 매매 단속을 결의하게 하였다. 그리고 1049년에는 자신이 지지하던 [[툴(프랑스)|툴]] 주교 브루노를 교황 [[레오 9세]]로 옹립하는 등 강력한 황권을 휘둘렀다. 레오 9세는 후에 [[그레고리오 7세]]로 즉위하는 힐데브란트를 중용하며 교회 개혁을 추진한다. 그리고 1056년,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하고 어린 하인리히 4세가 모후 아그네스의 섭정 하에 있게 되자 1059년, 교황 [[니콜라오 2세]]는 칙령을 발표하여 <오토 대제의 특권>이라 불리던 교황 선출권을 빼앗았다. [[분류:신성 로마 황제]] [[분류:독일 국왕]] [[분류:이탈리아 국왕]] [[분류:부르군트 국왕]] [[분류:바이에른 공작]] [[분류:슈바벤 공작]] [[분류:케른텐 공작]] [[분류:잘리어 가문]] [[분류:1017년 출생]] [[분류:1056년 사망]][[분류:슈파이어 대성당 안장자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